본문: 마 16:24

자기부인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부인’이 함께 들어간 구절은 6구절을 넘지 않고, ‘부인’이라는 말이 들어간 구절도 40구절이 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부인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농담처럼 남의 부인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이야기하나 하고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더구나 우리 예수님이 자기부인을 이야기하셨다면 이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게다가 자기부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부인’(self denial)은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주님을 부인한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 사실을 부인한다.’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또,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로 4번이 사용되었는데, 이중에 3번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서 사용이 되었고, 한 번은 주님이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 딤후 2:13에서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주인 되셔야 하기에 자신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여기에 예외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든지’는 누구를 말합니까? 그 앞에 보니까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아 따라가고자 하는 자는 제자들이며,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 가운데 베드로의 행동으로 인해 하신 말씀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이르러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당당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답합니다. 예수님은 칭찬하시면서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말씀하시고는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삼일 뒤에 부활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펄쩍 뛰며 말립니다. 항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에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립니다.

왜 베드로가 주님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강력하게 주님을 말렸을까요? 주님이 부활하신다는 말씀까지는 아직 믿을만한 믿음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아니면 정말 사랑하고 사랑하는 주님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라는 무시무시한 형틀에 달린다는 것을 막고자 하는 갸륵한 마음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다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주판을 튕겨보니 그러면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기에 주님을 말렸다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말씀하기 바로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한 번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사탄입니까? 베드로는 사탄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탄이 좋아할만한 말을 하고 있고, 그 말은 사탄적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높이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잠시 사탄적 생각이 마음에 들어와 하나님의 일보다는 도리어 사람의 일, 즉 자기를 위한 일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의 열망인 새로운 나라 강력한 왕국을 세워 예수님은 왕이 되고 자신은 총리나 장관이 되어야 하는데, 주님이 잡혀 죽으시겠다고 하니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주님을 위해서 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기를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따르는 사람은 결국 주님을 부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삶을 결국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기부인은 무엇입니까? 자기 일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자기 사랑을 멈추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며, 자신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유익을 앞세우는 것이며, 때로는 자신이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라면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처럼 쉽게 자기부인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옳음의 기준이 언제나 주님에게 있지 않고,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라 할지라도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면, 그 순간 주님의 일은 포기되고 내 일이 앞서 나갑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 마음에 ‘너가 너 자신의 주인이지, 왜 너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종이 되려고 하느냐.’하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면, 항상 자기 합리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지부조화 이론을 주장한 레온 페스팅거 교수는 말합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도 인간의 이중성을 언급하면서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고 말하나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맞서는데, 결국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고 말합니다.

몇 년 전 어느 가수 한 사람이 음주운전을 하여 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가 한 말이 매우 유명해진 적이 있습니다.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그래서 패러디가 많이 나왔습니다. 때리기는 했지만, 폭행은 아니다. 돈은 받았지만 뇌물은 아니다. 학교에서 나왔지만 땡땡이는 아니다.

왜 자기부인이 어려운가 하면 우리 안에는 이처럼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스와 넬리 리치필드가 함께 지은 ‘기독교 상담과 가족치료’라는 책에 보면 합리적 사고와 비합리적 사고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반드시 정신병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비교적 정상적이라는 삶을 살면서도 비합리적 사고를 할 수도 있다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스스로 완전치 못하며, 외부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으며 형성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내 주장이 옳고 내 생각이 옳다면, 이전에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옳아야 하며, 나를 보살핀 부모가 옳아야 하며, 모든 상황에서 나는 항상 옳은 행동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드릴 테니, 듣고 마음으로 한 번 yes와 no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1) 나는 알고 있는 모든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이해받아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다.

2) 완벽한 능력이 있고, 사교적이며, 성공을 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다.

3) 내가 행복하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문제가 풀려야 한다.

4) 과거의 일들이 현재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5)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6) 어떤 사람들은 나쁘고 사악하며 따라서 비난받고 처벌 받아야만 한다.

7) 원하는 것을 미루고 기다려서는 안 된다.

8) 인생에서 어려움은 부딪치기보다 피해가는 것이 편하다.

어떻습니까? 대답은 모두 no입니다. 이 질문을 나중에 다시 한 번 CD로 들으시면, 이 질문의 대부분의 표현이 ‘반드시, 모든, 해야만, 하지 말아야만’이라는 절대적이고 경직된 표현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아님에도 진리인 것처럼 must의 표현을 갖습니다.

내가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당장 이 일의 결과를 봐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누구의 생각입니까? 다 자기 생각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괜찮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 성경에 자기 부인이라는 표현은 5번이 넘지 않게 성경에 사용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이라는 표현이 없을 뿐이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부인의 과정들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본토와 친척, 아비 집까지 버려야 했고, 심지어 그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자기 집안의 귀공자에서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고, 지하 감옥의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이 아닙니까?

노아의 방주 만드는 일은 어떤가요? 욥이 모든 재산과 자식과 심지어 자기 육신의 건강을 다 잃었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아 풀무불에 들어가는 것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며, 자신에게 돌을 들어 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한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 모든 것들을 일반적인 자연인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나요? 자기합리화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사랑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나요? 이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부인하는 삶을 살았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주장을 버리고, 건강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심지어 생명까지 버립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자연인의 본성을 넘어 자기부인의 큰 짐을 지라고 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2:25에 주님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말씀하시고, 마태복음 19:29에서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더 좋은 대가를 바라기 위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기하라는 말로 듣는다면 아직 자기부인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집이나 가족을 버리는 행동을 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살라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가만 보면 우리의 희생도 그 안에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그 마음속에 누가 나 좀 알아봐 주었으면, 이렇게 열심히 하나 뭔가 좋은 일이 있겠지. 그리고 그처럼 바라는 것들이 안 이루어지면 미련 없이 떠나는 것 아닙니까?

단지 정치인들이 선거철에 시장을 찾아다니고 장애인들을 돕는 척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섬긴다고 하면서 하는 그 섬김에도 오늘 베드로와 같이 ‘주님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런 일이 주님에게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하는 거짓된 의도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그래서 십자가와 연결이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말씀합니다. 자기부인이 먼저 이루어지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순서로 보이지만, 사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있는 사람은 자기부인이 이루어진 사람이라 할 때,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은 별개의 삶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이 신앙인 태도라면, 십자가는 신앙인의 삶이며 행동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말로는 자기부인을 한다고 하는데 십자가는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사모하는데 은혜에 따르는 희생과 헌신과 순종은 남의 일로 여깁니다. 복 받기는 원하는데 복 받는 삶은 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남의 십자가를 지는 것도 아니며,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것도 아니며, 각자가 자기 몸에 짊어진 자기 분량의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남이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주님 앞에서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를 잘 견디어 내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각자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기부인이 안되면 내 십자가만 무거워 보이고, 남의 십자가는 십자가로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만 생각하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팔자가 좋을까, 나는 왜 이렇게 불쌍할까 그런 생각만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기 보다는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것에 원망하며 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의 과정을 거치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은혜의 십자가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지고 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찬송가 365장을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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