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더 이상 충격적이거나 새롭지 않은 사실이 되어 버렸고 이런 위기론은 이곳 미주 한인교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런 위기를 맞이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다양한 접근 방법과 분석이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런 현상을 겪게 된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있다면,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는 해법도 분명 있을 것이다. 본지는 그 해법을 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해 가기 위해 남가주 지역 신학교의 한인교수들을 만나 라는 주제의 특별 인터뷰를 마련했다.

그 첫번째는 기독교 윤리학자인 이학준 교수(풀러신학교)다. 미국 내에서도 마틴 루터 킹에 관한 권위자로 꼽히는 그는 템플대학교에서 M.A., 프린스톤신학교에서 M.Div., Th.M., Ph.D. 등의 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톤신학교에서 Ph.D. 학위를 받을 때에는 최우수(summa cum laude)로 졸업해 화제가 됐다. 이후 뉴브런즈윅신학교, 드류대학교, 뉴욕신학교 등에서 가르치다 2011년 풀러신학교에 교수로 부임했다. 뉴브런즈윅신학교 당시에는 동양인 최초로 종신교수에 임명돼 또 다시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기독교 윤리 분야에 다수의 책을 저술했으며 이 중 한국어로 쓴 책은 , 등이 대표적이다.

-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원인이 무엇이라 보십니까?

한마디로 교회와 성도들이 그 삶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 버려서 그렇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본질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공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것” 곧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과 공의는 서로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공의는 사랑의 최소치이고 사랑은 공의의 완성입니다. 사랑만 강조하면 값싼 은혜가 되고 공의만 강조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이 둘을 변증적으로 이해해야겠지요.

기독교는 무당이 점 치듯이 “지금 이걸 할까? 저걸 할까?”, “뭐가 더 안전하고 유익할까?” 이런 이기적이며 유행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 우리의 사역과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체내화하고 삶을 표출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성품을 좇지 않는 기독교는 우상이나 미신과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기독교에서 이런 본질적 가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사라지게 되면 곧 우상숭배가 되고 맙니다.

한국교회는 안타깝게도 이 질문을 깊이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위기와 멘붕에 빠진 것입니다. 멘붕은 보통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현상입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이나 정의구현사제단을 보십시오. 전 물론 그들이 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오늘날 한국의 가톨릭을 보면 이 세속화 시대 속에서도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심 덕분만이 아닙니다. 개신교에는 열심이 없어서 지금 이렇게 됐나요? 철야하고 새벽기도하고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뿐만 아니라, 전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가톨릭, 불교보다도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혜민스님이나 법정스님의 책들이 한국의 베스트셀러로 한국 지성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교회가 본질을 잊고 있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에 무관심한 교회는 없을 텐데, 이 본질을 향한 구체적인 접근법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서, 먼저 두 가지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자 하는가? 우리 안에서 비춰지는 우리의 모습, 소위 어느 목사가 성공했고 어느 교회가 부흥했다는 것 말고, 객관적 신앙적 진실을 확인하고 이에 충실해 보자는 말입니다. 둘째, 민심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 있는가, 그들은 무슨 고민을 갖고 있으며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기독교가 알고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어디 나가서 데모를 하자는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상담하고 교육하고 설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두 가지인 본질과 민심의 소리에서 실패했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좋은 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킹 목사는 흑인들이 억압으로 인해 자살하고 폭력으로 희생당하는 이 악한 문제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당시 백인들에겐 흑인들의 폭력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흑인들에겐 백인들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있었습니다. 킹 목사는 이 두 가지를 신앙적으로 정리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였고 기독교정신의 진수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인권운동가가 아닙니다. 3대째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 북부에서는 교수도 하고 큰 교회 목회도 할 수 있었지만 남부로 가서 25세부터 39세에 총탄에 맞아 죽을 때까지 복음을 공공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저런 것이구나!” 킹 목사로부터 그것을 본 사람들이 바로 짐 월리스, 데스몬드 투투, 태비스 스마일리 등입니다.

한국 가톨릭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습니다. 물론 개신교에는 한경직 목사가 있었습니다만 개신교에 킹 목사와 또 당시 민권운동에 깊이 참여했던 흑인교회의 교인들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더 많이 있었더라면 지금 개신교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 바로 대사회적 응답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 한국교회는 약간의 거부감도 있습니다만.

그런 부분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이익에 손상되는 일이 있을 때, 혹은 특정 정치인을 지원하는데 있어서는 요즈음의 한국교회들이 곧잘 정치에, 그것도 거의 정쟁에 가까운 수준으로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 개인입장에서는, 교회는 시민사회의 여론 형성과 가치형성에 직접, 간접으로 이미 참여하고 있기에, 사회 참여인가 아닌가보다는 어떤 동기와 뜻에서 참여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현재 한국 개신교의 이기심의 종교적 발로(發露)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떻게 교회를 키워서 어떻게 영향력을 미칠까? 그런 영성이 한국교회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단 안에서나, 교회 안에서의 싸움이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성, 공적 영성이 없고 사적 영성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종교성 안에 하나님 나라의 공적 측면이 없다면 쉽게 이기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자신의 능력 밖에 있다고 느낄 때에, 종교를 찾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기심과 종교성은 통할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하고 주목해야 합니다.

현재의 많은 교회들이 생존경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심리나 또는 이기심에 호소해서 생존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믿으면 잘 되고 복 받고 부자가 된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그러나 필요와 욕심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지만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욕심과 탈취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신앙적 체험과 교회에 대한 헌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욱 깊어지면 결국 복음의 사회성을 깨닫게 됩니다. 나가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죠. 자연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뤄내는 것이죠.

-“올바른 영성은 결국 사회적 측면, 공공의 영역에서 열매를 맺는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 예로, 킹 목사의 영향은 심지어 한인들에게도 미칩니다. 킹 목사가 없었으면 1965년 이민법이 개정될 수 없었고 아시안들에게 미국 이민의 문은 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 일반 언론들도 킹 목사의 활동이 깊은 영성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킹 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영성이 없었다면 이런 운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킹 목사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의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인 안창호, 이상재, 김규식, 조만식 선생들을 보십시오. 이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기독교인들인데 이 분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개인적 복음은 버렸습니까? 사회적 복음만 찾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가 모두 살아 있을 때, 1919년 개신교는 인구 2천만 명 중 고작 30만 명이었는데도 큰 힘을 발휘했 습니다. 만세운동도 전국의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16세에 독립운동을 이끈 유관순은 불신자도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교회들은 그런 아름다운 역사적 유산과 얼을 살리지 못하고, 이 유관순이 기독교의 유관순인지, 한국사회의 유관순조차 구분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복음 자체는 결코 개인과 사회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창조와 역사 전체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종교와 비종교의 구분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본질의 회복이 결국 영성의 문제로 직결된다면 올바른 영성을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도 물론 있겠지요.

이것은 결국 신앙적 세계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통전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뜻과 성품의 눈에서 읽는다는 것, 즉, 성경의 핵심적 가치들을 내 취향과 욕심에 따라 취사선택 하지 않고 본다는 뜻입니다. 내 교회 성장, 내 목회 성공을 위해 설교한다면 성경의 어떤 부분들-예를 들면 예언서-는 아마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도전이 두려워서 지나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경우 성경을 성경대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자기 아젠다(agenda)를 갖고 봅니다. 거꾸로 우리가 성경을 통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성품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갖고 계신가?”,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자신의 생각과 부딪히면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세계관 안에서만 성경을 보려 합니다. 곧 교회 성장이나 성공에 관한 부분만 보게 됩니다.

저는 보수적인 유교 집안의 장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접하기 어려웠고 교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가족의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꼭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며 부흥회나 새벽기도회를 통해 은혜의 체험을 하기도 했지만 제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당시 저와 같은 젊은이들이 겪는 고민과 아픔에 대해 교회는 답을 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신앙을 계속 해야 하나? 다른 무슨 답은 없는가?” 고민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면서 자연스레 저는 “내 눈으로 한번 성경을 읽어 보자”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며 교회에 봉사도 했는데 이제 내가 직접 성경을 읽어 보고 뭐가 있는지 정말 찾아봐야겠다. 아니면 괜한 인생의 시간 낭비 아닐까?”라고 고민했습니다. 물론 당돌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그만큼 절박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니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제가 희미하게나마 생각하던 의와 진리가 성경 속에서 확인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청년들이 겪던 삶의 문제는 교회 입장에서 귀찮기도 하고 또 해결할 능력도 없었기에 청년들이 자기들이 정해 놓은 틀 안에 들어오기만 바라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교회에 오기는 하는데 교회가 은혜와 현실을 매개해 주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죠. 이게 바로 많은 청년들에게 비춰진 한국의 70-80년대 교회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은 은혜의 능력을 삶의 복합적 현실 속으로 연결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이 각종 편지를 쓸 때 그는 자신의 글들이 신약성경이 될 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는 교회마다 일어나는 신학적, 윤리적 문제를 놓고 그것에 대해 하나 하나 응답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음행과 우상의 제물 문제, 갈라디아교회에는 할례 문제 등이 좋은 예죠. 이렇게 성경으로 들어가 보면 신앙과 윤리에는 구분이 없습니다.

-이 윤리가 무엇을 지칭하나요?

윤리는 무엇인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나쁜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유교적 접근법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바른 신자, 충실한 제자가 되는가”를 다룹니다. 이는 공부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부딪혀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것인가?” 이것은 윤리의 질문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복합적 현실 속에 사는 성도들이 이런 질문을 해 오는데 교회가 대답을 못해 주면 어떻게 될까요? 청년 때와, 결혼하고 자녀를 가진 후에 기독교인으로 사는 삶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평신도에서 장로가 됐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해방 전 기독교와 해방 후 기독교의 성도들은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할까요? 가난할 때 믿는 기독교와 부유할 때 믿는 기독교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쉽게 말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부자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졸부가 되듯이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본질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윤리입니다. 이미 시대는 변해서 사회적 요구가 달라졌는데, 교회가 답을 주지 못한다면, 성도들은 혼돈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태도와 자세가 바로 한국 개신교에 작금의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총체적 절망이네요. 희망은 있습니까?

저는 15-20년 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개혁이라는 말을 절제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들이 개혁해야 함은 인식하지만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 내적 힘을 못 찾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이사야서에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답을 찾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6장은 유다 왕국의 암울한 현실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영감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6장 초반부에서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이사야가 소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시며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백성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염려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의 한국교회에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가라, 전해라, 그런데 안 들을 거다.” 마음 속에 욕심이 있어 듣기를 싫어합니다. 한국교회도 이사야 시대처럼, 욕심으로 차 있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듣기를 거부한다고 봅니다. 요즘 한국의 일부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 욕심이 과열되어 폭발된 결과입니다. 나무는 열매로 안다고 하는데 공적 영성이 없이 종교의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이기심과 사적 욕심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결국 유다가 망하고 땅은 황폐해지고 그 백성은 멀리 옮겨집니다. 절망이죠. 그런데 6장 후반부로 가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라고 하십니다. 결국 6장 초반부에 나온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되는 사람만이 마지막에 남는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에서 나오는 하나님적인 것 외엔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전부 바벨론에 끌려가서 없어지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된 일들만 남아 그것이 씨가 되어 다시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희망입니다. 어디선가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의 중흥을 준비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 거룩한 씨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끝으로 이민교회가 특별히 더욱 집중해야 할 윤리적 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래도 이민교회는 한국교회보다는 상황이 낫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이 사회의 고통보다는 부와 권력에 얽혀 있으니 세상 사람들의 고통에서 멀어져 버렸습니다. 교인 가운데 고통 중에 있거나 사회에서 소외감을 갖고 온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소외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민교회는 대부분 성도들 자체가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기에 목회자가 그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교회의 적합성 자체를 잃어 버립니다. 물론 이민교회에도 어두운 면이 있지만 한국교회에 비교할 때 ‘교인들의 돌봄’ 면에 있어서는 낫습니다.

이민교회가 특별히 집중해야 할 과제는 다음 세대와의 관계, 나아가 미국사회와의 관계입니다. 우리 한인들이 지금 언어, 문화적 장벽 때문에 게토에 살고 있지만 다음 세대는 반드시 이 게토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민 온 이유도 우리 자녀들만은 미국의 일원으로 살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현 이민교회는 이를 해 줄 수 있는 사고와 역량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나오긴 했는데 가나안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가나안을 향한 비전보다는 여전히 애굽에서처럼 성공과 복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레위기를 통해 예배를, 민수기를 통해 공동체를, 신명기를 통해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애굽의 사고에서 가나안의 사고로 변화시키려는 모세의 커리큘럼이 현재 교회에 필요합니다. 은혜의 능력이 복합적 삶에 현실적으로 번역되어 표출되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의 코치여야 합니다. 사령관처럼 자기 군대에 넣고 일렬 종대로 세우는 시대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살아가는 시대와 문화와 고민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분석하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사는 삶의 정황을 모르고 말하니 교인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골라서 듣고 자기 삶의 방식대로 삽니다. 이제 교회는 모이는 교회이면서 동시에 내어보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에서 보듯이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살 수 있도록 구비시켜 주어야 합니다.

보내주신 사람들을 키우지 않고 모으기만 하려고 하는 것은 반복음적입니다. 예수께서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장면은 1명이 99명보다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한 사람을 키워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우리를 목적으로 삼고 사랑하셨는데, 우리가 사람을 수단으로만 삼으면 이것은 십자가와 위배되는 행위, 즉 반복음입니다. 우리는 특히 젊은 세대에 관심을 갖되, 한 명을 제대로 키워내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차세대 사역을 그저 베이비시팅 수준으로 전락시키진 않았나 반성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못하고 부모에게 얹혀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미국사회라는 높은 산까지 데려 간 후 밧줄도 주지 않고 그 산을 오르라 합니다. 지도도 주지 않습니다. 영어 잘하고 아이비리그에 가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현장 속에서 창조성, 지구력, 능력 있는 신앙을 구비해 주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현장성 있는 기독교인, 능력 있는 기독교인을 키워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이 있습니다.

출저: 기독일보(Mar 23, 2014 11:27 PM PDT)
http://www.christianitydaily.com/articles/77937/20140323/위기-속의-한국교회에도-종말론적-희망이-있다.htm?r=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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